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5세 (문단 편집) == [[헨리 8세]]와의 전쟁 == [[1534년]] [[헨리 8세]]가 '''<수장령>'''을 선포해 로마 교황청과 단절하고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자 양국 사이에 불안한 조짐이 흐르게 되었다. 스코틀랜드를 프랑스로부터 떼어내려 했던 [[헨리 8세]]는 외조카인 제임스 5세에게 자신처럼 로마 교황으로부터 독립하라고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러나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 되기보다는 잉글랜드를 견제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왕과 교황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더 만족스러웠다. 거기다가 헨리 8세는 외삼촌이었지만 부왕인 [[제임스 4세]]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으니.. 제임스 5세가 말을 듣지 않자 헨리 8세는 자기가 직접 토론으로 외조카를 설득하려고 했다.[* 헨리 8세는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고,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가 발표한 논문에 대해 반박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본 논문은 토머스 모어가 대필해줬다.~~] 그래서 헨리 8세는 자신의 잉글랜드 북부 순회때 요크(York)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전갈을 보냈다. 제임스 5세는 대충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헨리 8세는 제임스 5세가 올거라고 믿으며 요크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임스 5세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헨리 8세는 흥분하지 않고, 제임스 5세에게 >"너그러운 삼촌으로서, 조카가 오지 않은 것을 기꺼이 용서해 주겠다." 라는 요지의 편지를 보냈지만 뒤로는 자신을 무시한 외조카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러다가 신성 로마 제국과의 [[이탈리아 전쟁]]으로 프랑스가 바빠지자 헨리 8세는 드디어 괘씸한 외조카를 손봐줄 기회가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10,000명의 병력으로 스코틀랜드로 쳐들어가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헨리 8세가 제임스 5세의 딸인 [[메리 1세(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의 메리]]를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 6세]]와 혼인시킬 것을 요구하면서, 8년 동안 벌어진 이 전쟁을 '''거친 구혼'''(Rough Wooing)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전쟁은 헨리 8세가 승하하고, [[에드워드 6세]]가 즉위할 때까지 이어졌다.] 제임스 5세는 즉시 군대를 소집해서 맞서 싸웠고 결국 잉글랜드군은 고전 끝에 스코틀랜드에서 철수했다. 잉글랜드를 증오하는 제임스 5세는 복수하겠다며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친정에 나서 18,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제임스 5세의 스코틀랜드군은 처음에는 '''해든 리그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스코틀랜드군 2,000명이 잉글랜드군 3,000명과 싸웠는데 이때 잉글랜드군을 2,000명이나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1542년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Battle of Solway Moss)에서 3,000명의 잉글랜드군에게 맞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참패했다.[* 숫적으론 잉글랜드군이 열세였지만, 스코틀랜드군이 공격을 받았을 때 진흙탕속에 군대가 있어 위치가 나빴고, 무엇보다 잉글랜드군에겐 스코틀랜드군에게는 없었던 경기병이 대규모로 있었다.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은 20명이 전사했고, 도주하다가 수백 명이 강에 빠져 익사했으며 1,2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잉글랜드군은 피해가 고작 전사 7명에 불과했다.] 이 패배로 낙담한 국왕 제임스 5세는 스코틀랜드로 귀환하면서 국경 지대 방비를 강화하라는 몇몇 지시를 내리고, 임신한 왕비 마리 드 기즈와 함께 린리스고(Linlithgow)로 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